박보영과 박진영 주연의 드라마 〈미지의 서울〉은 문제 해결보다 존재 인정에 집중하는 독특한 서사를 보여줍니다. 12부작의 짧은 미니시리즈지만, 쌍둥이 미지와 미래가 서로의 삶을 바꿔 살아가며 자신의 진정한 존재를 찾아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이 드라마는 통쾌한 카타르시스 대신 조용하고 싱그러운 위로를 건네며, 시청자들에게 "살자고 하는 짓은 다 용감한 거야"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조금은 싱거운 드라마가 주는 존재의 발견
〈미지의 서울〉은 한국 드라마의 전형적인 공식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대부분의 한국 드라마가 로맨스와 코미디를 중심으로 강렬한 갈등과 시련을 반복하는 것과 달리, 이 작품은 의도적으로 담백한 서사를 택했습니다. 공감성 수치가 높은 시청자에게 사랑 앞에서 창피를 당하는 순간들을 가볍게 웃음으로 넘기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미지의 서울〉은 끈질기게 고통과 수난을 반복하지 않으며, 시련이 있다 해도 두 회차를 넘어가는 법이 없습니다. 이러한 '싱거움'은 오히려 드라마의 가장 큰 강점이 됩니다. 삼삼한 뭇국처럼 느껴질 수 있는 이 심심한 빈틈을 통해 시청자는 '존재'라는 본질적인 주제를 발견하게 됩니다. 똑같이 생긴 쌍둥이 미지와 미래는 어린 시절 손가락을 걸면 하기 싫은 일을 대신해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장난 같았던 이 작전은 결국 꼬리를 잡히고, 미지가 머리를 자르는 것으로 일단락됩니다. 사춘기를 지나며 둘은 머리뿐만 아니라 성격도 취향도 완전히 다른 하나의 존재가 되어갑니다. 미래의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 다시 꺼내든 어린 날의 약속은 완전 범죄 같으면서도 어딘가 허술합니다. 하지만 이 장치를 통해 둘은 이해하지 못했던 서로의 삶에 다가서게 됩니다. "미래는 밥 먹듯이 1등을 했고, 나는 그냥 전교 1등으로 밥 먹는 애였다"는 대사는 같은 환경에서도 얼마나 다른 존재로 살아왔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30대 시청자의 입장에서 이 지점은 특히 공감됩니다. 우리는 늘 비교당하고 평가받지만, 실제로 각자의 삶은 완전히 다른 무게와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가장 현실적인 지점은 성장의 방식입니다. 미지와 미래의 성장 포인트는 성공이 아니라 구분됨에 있습니다. 똑같이 생겼다는 이유로 하나처럼 취급되던 두 사람이 서로의 삶을 건너가 보며, 그 차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체감하고 나서야 "나는 너가 아니고, 너도 내가 아니다"라는 당연한 사실에 도달합니다. 미지를 좋아하는 호수, 손녀를 사랑하는 할머니에게는 둘의 존재가 보입니다. 머리를 잘랐다가 붙이고, 말투를 흉내 내고, 옷을 바꿔 입는 것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 바로 존재입니다.
싱거운 드라마 속 문제보다 존재를 택한 서사
〈미지의 서울〉은 표면적으로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다룹니다. 미지는 진로 문제를, 미래는 직장 내 괴롭힘을, 호수는 장애와 부조리의 문제를 겪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사회 고발적인 문제를 다루면서도 정의 구현의 서사가 미흡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확실한 악은 처벌되는 듯 보이지만, 알게 모르게 동조하고 방관했던 이들은 잊히는 것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작진이 직장 내 괴롭힘의 부조리함을 응징하는 사이다를 원했다면, 더 철저하게 악인을 재기불능으로 만드는 서사를 택했을 것입니다. 미지와 미래를 더 모질게, 호수를 더 유능한 변호사로 설정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시청자의 속을 잠시 시원하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여전히 문제에 앞서 '존재'를 택합니다. 미래는 그저 자기의 이름처럼 '미래'를, 자기 자신을 찾아 떠납니다. 과거의 일은 법에 맡기고서 말입니다. 어쩌면 도시락을 싸 들고 다니며 잘못을 저질렀던 숱한 미움의 대상들을 응징하는 것만이 답은 아닙니다. 조금은 성에 차지 않을지라도 법에 그들을 맡기고, 내 삶에 집중하는 것이 나를 위한 길일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태도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아도, 떠나는 선택도 존중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30대 시청자들에게 특히 크게 와닿습니다. 우리는 늘 버티고 증명해야만 성숙해지는 것처럼 강요받는데, 이 드라마는 도망쳐도 괜찮고, 쉬어도 괜찮다고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상월의 서사는 이 드라마가 갈등을 어떤 방식으로 조명하는지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줍니다. 친구 로사의 이름을 빌려 쓰고 있는 상월에게 이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위태로운 외줄 타기입니다. 상월의 관심은 건물도, 돈도 아닙니다. 재개발 과정에서 자신이 로사가 아닌 상월임을 들킬까 하는 두려움뿐입니다. 마침내 불리할 것만 같았던 법적 공방에 마침표를 찍은 건 부끄러워 차마 드러내지 못했던 자신의 이름인 '현상월'입니다. "나와 상월이를 한 단어로 담아보려 평생 애썼지만 모두 어딘지 넘치거나 모자라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허나 현상월이 어떤 사람인지는 세 글자로도 담을 수 있어요. 김로사." 상월은 로사였습니다. 아무도 로사를 책임져주지 않던 그때에, 그의 죄까지도 짊어지기로 결심했던 '김로사'였습니다. 상월은 로사의 이름으로 감옥에 갔고, 재산의 상당 부분을 그의 이름으로 기부했습니다. 한낱 종이 몇 장으로 담을 수 없는 인생입니다. 한 사람의 삶은 적어도 단 두 사람을 정의할 말보다 많은 것을 담습니다.
이상한 하나가 되는 용기와 존재적 인정
〈미지의 서울〉이 전하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살자고 하는 짓은 다 용감한 거야"라는 대사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멀쩡한 척 애써도 결국은 고장 난 내가 누군가와 둘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 앞에서, 이 드라마는 부족한 하나에서 그쳤을 우리가 서로 곱해져 양의 값을 갖게 될 수 있다고 답합니다. 시작은 미미해 보일지라도 그런 날이 거듭 반복되다 보면 결국 유한히 성장하게 됩니다. 사랑이란 서로의 결함을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품는 일입니다. "사슴이 사자 피해 도망치면 쓰레기야? 소라게가 잡아먹힐까 봐 숨으면 겁쟁이야? 다 살려고 싸우는 거잖아. 암만 모냥 빠지고 추저분해 보여도 살자고 하는 짓은 다 용감한 거야." 이 대사는 〈미지의 서울〉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입니다. 도망친 순간, 숨은 선택, 비겁하다고 여겼던 과거를 전부 다시 바라보게 만듭니다. 대부분의 상처는 잘못 그 자체가 아니라 죄책감으로 곪습니다. 후회에 잠긴 미련이 발목을 붙잡는 일이 허다합니다. 겁먹고 도망쳤던 순간들을 원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싸워서 이긴 사람보다 도망쳐서 살아남은 사람이 많다는 건 진리입니다. 무엇보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언제나 함께였습니다. 아쉬운 선택들, 미루고 외면했던 시간들까지도 모두 '살려고 한 몸부림'이었다고 인정해 주는 것, 이것이 바로 존재적 인정입니다. 사랑들은 존재로서 사랑받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 주었으면 한다'는 말에 사랑이라고 이름 붙였던 수많은 순간이 스쳐 지나갑니다. 약해서 숨었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남들이 해내지 못했다고 나도 실패하리라 속단하지 않는 것이 바로 존재적 인정입니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서로의 모자람을 채운 하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설렘이 만남을 재촉합니다. 약하고 초라하면 실망해야 하는데, 오히려 사랑하게 됩니다. 그때야 비로소 문제가 아니라 존재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이상한 하나가 되고,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하나가 됩니다. 〈미지의 서울〉은 정주행 후 "아무 일도 안 일어났는데, 내가 조금 달라졌다"는 느낌을 줍니다. 주인공들은 무언가를 크게 성취하지도, 통쾌하게 세상을 이기지도 않습니다. 대신 자기 삶을 대신 살아주던 타인의 시선을 내려놓고, 비로소 자기 이름으로 숨 쉬기 시작합니다. 이 드라마가 특별한 이유는 악을 명확하게 응징하기보다 인물들이 자기 삶을 다시 끌어안는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끝나고 나서도 묘하게 조용하고, 오래 여운이 남습니다. 〈미지의 서울〉은 "괜찮아졌니?" 대신 "여기까지 잘 살아왔구나"라고 말해주는 드라마입니다.
[출처]
비로소 존재가 보이기 시작했다 - 미지의 서울: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7063#link_guide_netfu_64709_773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