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는 단순한 재일한인의 이야기를 넘어, 근대 국민국가 체제에서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자이니치의 특수한 위치를 조명합니다.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 4세대에 걸친 생존의 기록은, 민족과 국가라는 근대적 범주가 얼마나 불안정한 구조 위에 세워졌는지를 보여줍니다.

K-디아스포라 서사와 보편적 공감의 가능성
파친코는 한국계 디아스포라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손쉽게 한국 드라마로 분류할 수 없습니다.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특정한 정체성, 한국 내에서만 살아온 한국인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정체성이 이 드라마의 근본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국제무대에서 호평받은 '미나리', '패스트 라이브즈', '성난 사람들' 등의 작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작품들의 성공 요인 중 하나는 한국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지만 이주와 정착이라는 디아스포라의 보편적 경험에 소구할 수 있는 관점으로 이야기한다는 점입니다. 디아스포라 문학은 '나는 누구인가?'(Who Am I)라는 물음의 답을 찾는 여정이자, 경계에 있는 소수자들에 대한 일종의 '증언록'입니다.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디아스포라는 '너머'를 뜻하는 디아(dia)와 '씨를 뿌리다'라는 스페로(spero)가 결합한 합성어로, 본래는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탈국경·세계화로 인해 그 의미가 확장되었습니다.
노동, 생계, 망명, 전쟁난민, 입양, 결혼이주 등 다양한 정체성을 다룬 작품들이 등장하면서, 세계 문학 시장에서는 포용성과 다양성을 강조하는 디아스포라 문학이 이미 주류 장르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2021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압둘라자크 구르나는 탄자니아 섬 잔지바르 출신의 난민으로, 스무 살에 아랍계에 대한 박해로 고향을 떠나 영국에 정착했습니다. 그의 작품 '낙원', '바닷가에서', '그후의 삶'은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주의 통치가 남긴 유산과 고향을 떠난 사람들의 상실감을 다룹니다. 구르나는 "배타성과 타인에 대한 거부는 역사적으로 모든 사회에서 항상 발견돼 왔다"며 "누군가의 삶이 전쟁 폭력 궁핍에 의해 위협받는다면 우리는 그들을 인류로서 환대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파친코 역시 이러한 보편적 인류애와 연대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선자와 그녀의 가족이 보여주는 생존 전략은, 거창한 민족 해방 서사보다 더 집요한 저항이자 연대의 형태입니다.
자이니치의 특수한 위치와 법적 타자성
자이니치는 단순히 '해외에 사는 한국인'이 아닙니다. 이들은 민족·국가·시민권이라는 근대적 범주에서 미끄러져 나온 존재입니다. 파친코에서 솔로몬이 요코하마 구청에서 'resident alien'(거주 외국인)으로 등록하는 장면은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라, 제도적 폭력의 상징입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어로 사고하지만, 법적으로는 영원한 외국인으로 남는 이 모순적 상황은 1952년 일본의 주권 회복 이후 다수의 재일조선인이 국적을 상실하며 무국적 상태가 된 역사적 맥락에서 비롯됩니다. 작가 이민진은 예일대 역사학과 재학 시절부터 약 30년간 이 이야기를 구상했습니다. 1968년 서울 태어나 1976년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간 이민 1.5세대로서, 그녀는 자이니치의 경험을 단순한 비극적 역사 재현이 아니라 민족 정체성의 불안정성을 드러내는 사회학적 서사로 완성했습니다.
한국계 미국인 제작진과 한국·미국·일본의 다국적 제작진이 참여한 이 드라마는, 그 자체로 디아스포라적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동적 근대' 개념은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바우만은 현대 사회를 경계와 구조가 해체된 유동적 상태로 설명하지만, 그 유동성은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습니다. 자본과 엘리트는 자유롭게 이동하지만, 자이니치는 오히려 더 강하게 고정됩니다. 일본 사회는 '민족적 동질성'이라는 신화를 유지하기 위해 그들을 끊임없이 타자로 위치시킵니다. 경계가 사라진다면서도, 특정 집단에게는 국적·지문·등록증이라는 장치로 경계를 재각인하는 것입니다. 모자수가 경제적 성공을 거두어도 "우리는 추방될 수 있다"는 말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 구분 | 자이니치의 특징 | 제도적 현실 |
|---|---|---|
| 출생지 | 일본에서 태어남 | 법적으로 외국인 신분 |
| 언어 | 일본어로 사고하고 생활 | 문화적으로는 일본인 |
| 국적 | 1952년 이후 국적 상실 | 외국인 등록 대상 |
| 정체성 | 영원한 경계인 | 제한된 권리 |
민족 정체성과 근대 국민국가의 균열
파친코의 서사는 전형적인 민족주의 서사와 거리를 둡니다. 선자와 가족은 '조국'을 위해 싸우지 않습니다. 그들의 중심에는 오직 생존, 즉 "배가 황제"라는 감각이 있습니다. 이는 포스트콜로니얼리즘 이론에서 말하는 식민지 주체의 일상적 생존 전략과 맞닿아 있습니다. 식민 지배는 단순한 영토 점령이 아니라, 노동·신분·언어·종교를 통제하는 권력 체계입니다. 자이니치는 그 체계 속에서 합법적 시민도, 완전한 외부자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 놓입니다. 그 결과 생존은 곧 저항이 됩니다. 김치를 팔고, 파친코 산업에서 일하고, 아이를 교육시키는 행위는 거창한 민족 해방 서사보다 더 집요한 저항입니다.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1980년대 일본 버블경제까지 역사적 흐름 속에서, 작가 이민진은 의도적으로 전지적 화자나 역사적 맥락 설명을 배제했습니다. 대신 우리는 사건을 오직 주인공들의 시각에서만 바라봅니다. 그들은 자신이 겪는 세계 너머를 이해하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서술 전략은 독자로 하여금 '역사'가 아니라 '삶'에 집중하게 만듭니다. 소설의 첫 문장 "역사가 우리를 실패시켰지만, 상관없다"는 선언은 바로 이 지점을 관통합니다. 여기서 '역사'란 대문자 H로 시작하는 History, 즉 국가와 권력의 서사를 의미합니다. 파친코는 그러한 공식 역사에서 누락된 사람들, 평범하지만 비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파친코라는 게임 자체도 강력한 메타포로 기능합니다. 작가 이민진은 "이 게임을 인생의 비유로 본다. 인생이 때론 불공평하다고 믿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 게임을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공은 통제 불가능하게 떨어집니다. 운과 구조가 얽힌 시스템 속에서 개인은 미세한 선택만 가능합니다. 이는 자이니치의 정체성이 단순한 문화적 차이가 아니라, 언제든 법적·정치적으로 박탈될 수 있는 조건 위에 놓여 있음을 보여줍니다. 민족은 혈통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권력이 승인하는 범주의 문제임을 드러내는 지점입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시민권을 가진 사람에게 국가는 배경처럼 존재하지만, 자이니치에게 국가는 언제든 삶을 흔드는 전면적 구조입니다. 파친코는 자이니치를 통해 묻습니다. 민족 정체성은 누구의 정의에 의해 결정되는가? 국가는 누구를 포함하고, 누구를 영원한 외국인으로 남겨두는가? 이러한 질문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발생한 전쟁 난민, 아프가니스탄 특별기여자들의 한국 정착, 국제 이주노동자와 결혼이주여성의 문제 등은 모두 디아스포라의 현재진행형 서사입니다.
| 시대 | 역사적 배경 | 파친코 속 서사 |
|---|---|---|
| 일제강점기 | 토지 약탈과 강제 이주 | 선자의 가족, 영도에서 오사카로 이주 |
| 2차 세계대전 | 전쟁과 식량 부족 | 김치 장사로 생계 유지 |
| 1952년 이후 | 일본 주권 회복, 재일조선인 국적 상실 | 무국적 상태의 법적 타자로 전락 |
| 1980년대 | 일본 버블경제 | 모자수의 경제적 성공과 여전한 불안 |
결국 파친코는 역사극이 아니라, 근대 국민국가의 균열을 드러내는 사회학적 서사입니다. 자이니치라는 특수한 위치는 예외가 아니라, 근대 국가 체제의 그림자입니다. 그 그림자 속에서 이어진 4대의 생존은,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 감춰진 권력 구조를 조용히 폭로합니다. 불공평한 게임이지만, 그들은 게임판을 떠나지 않습니다. 떠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서사는 더 비극적이고, 동시에 더 단단합니다. K-디아스포라의 이야기를 손쉽게 K로 퉁치지 말고, 그들의 특수한 경험과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K컬처는 보다 많은 소수자의 보편적 공감을 얻을 가능성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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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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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xtualizing Min Jin Lee's Pachinko: https://www.asianstudies.org/publications/eaa/archives/contextualizing-min-jin-lees-pachinko/
경계인들의 증언록...주목받는 디아스포라 문학: https://www.edaily.co.kr/News/Read?newsId=01223446632398784&mediaCodeNo=257&OutLnkChk=Y
파친코, K디아스포라와 그들의 이야기 [이지영의 K컬처여행]: https://www.segye.com/newsView/20240815512543?OutUrl=naver